오십유오이지어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爲政> 4

子曰: “吾十有五而志於學, 三十而立, 四十而不惑, 五十而知天命, 六十而耳順, 七十而從心所欲, 不踰矩.”
자활: 오십유오이지어학, 삼십이립, 사십이불혹, 오십이지천명, 육십이이순, 칠십이종심소욕, 불유구.
<爲政> 4
해석:
“나는 열다섯에 학문에 뜻을 두었고, 서른에 (예의를 알아서) 언행이 바로 섰으며, 마흔에는 모든 일에 현혹됨이 없었고, 쉰에는 천명을 알게 되었고, 예순에는 사물의 그 이치를 들어 저절로 알게 되었고, 일흔에는 무엇이든지 하고 싶은대로 행하여도 법도에 어긋나는 일이 없었느니라.”

주석:

  1. 유(有): 우(又)와 같음. 십유오(十有五)는 ‘열하고도 다섯’, 즉 열 다섯이란 말이다.
  2. 십유오이지어학(十有五而志於學): 옛사람들은 15세가 학문에 입문하는 나이이다. 정현(鄭玄)이 주(注)를 단 상서전(尙書傳)에서는 “15세에 소학(小學)에 입문하고, 18세에 대학(大學)에 입문한다”고 하였다.
  3. 립(立): 예의로써 바로 서다. 태백편(泰伯編)에 “입어례(立於禮, 예로써 사회에서 바로 바로서다)”라 하였으며, 계씨편(季氏編)에는”불학례, 무이립(不學禮, 無以立, 예를 배우지 않으면, 사회에서 바로 설 수가 없다)”고 하였다.
  4. 불혹(不惑); 자한편(子罕編)과 헌문편(憲問編)에 모두 “지자불혹(知者不惑)”이라는 말이 있다. 지식을 갖춘 사람은 현혹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5. 지천명(知天命): 천명(天命)을 거스를 수 없음을 깨닫고 천명에 따른다.
  6. 이순(耳順): 다른 사람의 말을 들었을 때, 그것이 진실인지 아닌지, 옳은지 그른지를 능히 헤아릴 수 있다는 뜻이다.
  7. 종심소욕 불유구(從心所欲 不踰矩): 종(從)은 좇다. 따르다. 종심(從心)은 마음이 가는 데로 따른다.
  8. 유구(踰矩): 유구(踰)는 넘다. 초월하다. 뛰어넘는다는 뜻. 구(矩)는 곱자, 방형(方形)을 그리는데 쓰는 자인데 여기에서는 법도, 규범의 뜻으로 쓰였다.

이것은 공자 자신의 일생에 대한 총평이라고 할 수 있다. “오십유오이지어학(吾十有五而志於學)”이라고 한 것은, 공자가 열 다섯 살부터 학문에 뜻을 견고히 하였음을 설명한다. 소년시기의 공자는 십오세에 인생여정의 희망찬 첫걸음을 내딛었던 것이다. 후세의 문인학자들은 모두 공자를 거울로 삼아 소년기부터 학문에의 뜻을 확립하거나 형성해 나갔다.

“삼십이립(三十而立)”이라고 한 것은, 이 때가 되어 공자가 이미 재능을 확고히 하여 세상에 홀로 우뚝 서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 시작하였음을 의미한다. 이 때까지 공자는 열심히 땀흘리며 공부해서 학문의 기초를 튼튼히하여 인생의 새로운 단계, 즉 사회인의 한 사람으로서 정신적 · 학문적 · 경제적으로 자립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사십이불혹(四十而不惑)”은 이 때의 공자가 이미 총명과 예지를 갖추어 정신적으로 성숙하였음을 의미한다. “지자불혹(知者不惑)”이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능히 사물을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분석하여 정확한 결론을 이끌어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뿐만아니라 어떠한 외부의 유혹에도 흔들림이 없이 자신의 주관과 소신을 일관되게 실천하였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오십이지천명(五十而知天命)”은 오십이 되어서는 하늘이 부여한 숙명과 사명을 인식하고 조금도 태만하거나 소홀하지 않고 그 사명을 완성해 나갔음을 의미한다.

“육십이이순(六十而耳順)”은 공자가 어떠한 일어던 한 번 들으면 곧 그 일의 전후사정을 훤히 깨달았다는 뜻으로 경륜이 높고 식견이 광범하다는 뜻으로도 풀이된다.

“칠십이종심소욕(七十而從心所欲) 불유구(不踰矩)”는 공자 만년의 생활을 개괄한 것이다. 겉으로는 방종하고 아무런 구속이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절제되고 규율에 부합하였다. 이는 동싱 공자가 만년에 취한 생활의 자세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난곽적이면서도 엄숙함이 배어 있는 것이다. 세상 만물은 흔히 양면성을 지니는데, 방종하고 구속이 없는 생활과 절제되고 규율이 있는 생활은 서로가 모순된다. 그러나 그것이 공자가 만년에 인생의 철리(哲理)와 자연의 이치를 깨닫고서 노니는 독특한 생활방식으로 이해된다. 이 구절은 우리에게 아주 특별한 생활의 절주(節奏)를 느끼게 한다.

출처 : 하나를 둘이라 하지 말고, 이것을 저것이라 하지 말라. 이 준희 편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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